중쇄를 찍자, 언내추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속도가 느리고 호흡이 길어 긴 시간 동안 한 작품을 보고 있어야 하는데, 난 그걸 잘 못 한다. 이상하게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 했던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완전한 일반화긴 하지만, 유명했던 드라마를 떠올려 보면 내용의 7할 정도는 여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진 스토리지 않나? 남성과의 사랑에 목매는 여성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일본어를 전공하는데도 일본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본 특유의 ‘여자력’을 뽐내는 문화를 상상해보니 캐릭터 구성, 말하는 방식, 일률적인 행동 등 거슬리는 연출이 너무 많을 것이라 생각해 도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게된 것이 언내추럴. 의학 드라마기 때문에 일본어 공부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사랑이야기가 주가 아니고 심지어 주인공이 전문직 여성이라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언내추럴을 보고 한바탕 반해버린 나는 작가(노기 아키코)의 다른 작품(중쇄를 찍자,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도 찾아보며 일본 드라마, 아니 노기 아키코의 매력에 푹 빠졌다.

중쇄를 찍자
언내추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노기 아키코의 세 작품 ‘중쇄를 찍자’, ‘언내추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쇄를 찍자는 출판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언내추럴은 법의학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가사 노동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연출도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여성 캐릭터를 아주 매력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쇄를 찍자는 전직 유도선수 코코로(쿠로키 하루)가 출판사 주간 만화 편집부에 입사하며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일부러 이름을 코코로(心의 일본 발음)라고 지은 것일까 싶게, 따뜻한 시선으로 출판사의 여러 일을 해결해 나간다. 일본판 미생이라고 불릴 정도의 작품인데 만화가 원작이라 그런지 과한 교훈을 띄는 것을 제외하고는 미생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여자라서 그런 거 맞다-. 코코로와 함께 다니는 코이즈미(사카구치 켄타로)가 소심한 남성 캐릭터라는 점도 맘에 든다. 

언내추럴은 인물만 일본인인 미국드라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고 흥미로운 법의학 드라마다. 사고부터 사건까지 다양한 모습의 죽음이 다뤄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적절하다. 하지만 스토리 구성은 차치하고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이 훌륭하다. 그 중 눈에 띄는 조합은 주인공 미스미(이시하라 사토미)와 조력자 쇼지 유코(이치카와 미카코)인데 여자력과는 거리가 먼 –편견에 찌든 발언- 두 인물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설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일본 드라마에서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안 했던 내가 죄스러워질 정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앞선 두 작품과 조금 다르게 결혼과 연애 즉 남성과의 사랑이 주가 되는 드라마다. 설정부터 탈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가부장제가 만든 결혼이라는 제도로 인해 여성의 노동이 얼마나 과소평가 되어 왔는지를 주창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쿠미(아라가키 유이)는 계약 결혼의 형태로 가사 노동을 하게 되는데, 계약으로 맺어졌을 때는 당연했던 노동의 대가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으로 바뀌었을 때는 당연한 여성의 헌신으로 변화하는 불합리한 지점을 잘 표현한다. 더불어 광고 회사에서 커리어를 펼치고 있는 비혼주의자 유리(이시다 유리코)와의 대화는 사회가 일하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각본가 ‘노기 아키코’

노기 아키코의 작품을 통해 알게된 것은 일본 드라마가 의외로 일하는 여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도 최근 들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비춰 주고는 있지만 일본 드라마는 특유의 교훈적 연출 덕분인지 그 모습이 더 잘 부각된다. 특히 노기 아키코는 각 주제에 맞게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내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점이 탁월하다. 연출이 눈에 띄지 않는 장르라면 각본과 캐릭터의 힘이 중요한데 노기 아키코는 모든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 신선한 스토리를 만들고 그렇게 여성에게도 노동이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마치 여성에게 사랑만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걸까 싶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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