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는 비치가 아니라고

‘영국판 응답하라 시리즈’라고도 알려진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는 나의 인생 드라마 중 하나로 등장하는 대사와 음악을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작품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오아시스와 블러의 시대에 살아보는 것이 꿈인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대/공간적 배경과 ost의 활용(시즌 1 에피소드 6 마지막 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 레이의 일기장을 빌린 날것 그대로의 발칙한 속마음 나레이션과 재미있는 연출, 상처가 많은 레이를 보듬어주려는 잘생긴 남자주인공과 당장이라도 끼고 싶은 ‘gang’의 존재, 가시적으로 보이는 레이의 심리적인 성장 등이 그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전부 각설하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은 레이의 가장 친한 친구 ‘클로이’다.

<킬링 이브>를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빌라넬’은 여러 이유로 충격적이지만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의 광팬인 내가 두 번 놀라웠던 것은 ‘클로이’로써만 알고 있었던 조디 코머의 완벽한 연기 변신이었다. 가차 없는 싸이코패스 킬러 ‘빌라넬’과 달리 ‘클로이’는 시즌 2 중반까지, 특히 시즌 1에서는 전형적인 하이틴 퀸카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연코 ‘악녀’는 아니다. 극중 클로이는 예쁘고, 몸매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남자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레이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할 때도 핀을 두고 경쟁을 할 때도 일명 ‘bitch’처럼 굴 때도 있지만 끝끝내 레이가 미워할 수 없는 말하자면 레이의 아픈 손가락과도 같다. 악녀라고 칭하기엔 여러 모로 무리가 있다.

시즌1을 돌이켜 보았을 때, 아니 사실은 시즌 2에서 클로이의 일기장과 함께 그의 속내가 전부 밝혀지기 전까지 레이의 시선으로 보는 클로이의 언행은 욕을 먹기에 최적화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얄밉고 철이 없다. 초반에 레이를 자신의 ‘gang’에 끼워주기 싫어하는 듯한 말들부터 나이가 한참 많은 선생님과의 연애, 탈의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그것도 살이 찌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레이가 수영복을 입은 채 내쫓기게 하는 장면,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는 레이의 말을 들어주다 말고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는 장면 등 좋게 볼래야 볼 수가 없는 일들을 자꾸만 벌인다. (물론 나는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기 때문에 좋게 봤지만!)

그러다가 충격을 주는 것은 앞서 잠깐 이야기했던 클로이의 다이어리가 등장하고서다. 이제까지 레이의 시점으로 진행되었던 이야기가 클로이의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에 대한 각기 다른 기억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출적으로도 흥미로우나 일단 내용에서부터가 반전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다. 겉보기에 완벽한 퀸카 클로이는 사실 자존감이 매우 낮고, 어딘가 결핍되어 있으며 자꾸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에 대해 자신이 못나서라는 이유를 대면서 스스로를 증오하고 있었던 것.

언뜻 비춰지는 부모와의 식사 장면으로 미뤄 보았을 때 클로이는 그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을뿐더러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클로이가 밥이 너무 적다고 말하면서 아빠의 것과 비교하려하자 엄마는 ‘그만큼만 먹어야지 살이 안 찐다. 남자는 원래 먹는 양이 많잖니’와 같은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 뒤로 ‘레이처럼 재미있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정말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나레이션이 흐른다.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예쁘고’ ‘마른’ 여성이길 강요받았을 클로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은 얼굴과 몸으로 남자를 꼬여내는 것이었다. 정말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클로이는 그렇게 한다. 그것이 자신을 증명해주는 일이라 착각하면서.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드라마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자기혐오는 늪과 같다. 레이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더라면 클로이는 끝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심적으로 곪아 터져버린 클로이를 구해내는 일은 또한 레이의 성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때문에 나는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를 레이의 성장 서사와 더불어 그려진 클로이의 성장 서사로 본다. 레이와 핀의 관계보다 더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레이와 클로이의 관계는 볼 때마다 나로 하여금 여러 감상을 불어 일으킨다. 딱 그 나잇대처럼 싸우고 화해하고 죽이고 싶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그러다 끝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다르지만 같은 두 여성 청소년 캐릭터 너무 좋으니깐. 딱 백 번만 더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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