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제한된 시간 안에 각자 쓰고 이달의 장원으로 뽑힌 멤버의 글을 첫 문단으로 하여 릴레이 소설을 씁니다.
4월의 문장은 영화 화양연화, 차우의 “부탁이 있소”이고, 장원은 183입니다.

*일필휘지의 기획은 궁유정, 이옥섭, 한태의 감독님의 글쓰기 모임인 일필휘지를 빌려온 것으로 세분께 콘텐츠 제작을 허락받았습니다.

[가상캐스팅]

보경/ 전종서
시니컬하고 행동력이 뛰어나다.

지수/ 최성은
멘탈이 한 번 깨지면 복구가 더딘 편이다.

「부탁이 있어」

글쓴이/ 땡선 빈다 오이 183

부탁이 있어.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던 지수가 산송장 같은 얼굴로 문득 중얼거렸다. 대 자로 누워 아껴뒀던 담배를 피던 보경이 연기를 후 뱉은 다음 물었다.
“뭔데.”
그렇게까지 궁금하단 말투는 아니었다.
“나 감염되면 그냥 죽여주라.”
잠깐을 아무 말이 없던 보경은 곧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랄한다. 그럼 내가 니 좀비 되고 나서도 평생을 뒤치다꺼리하면서 살 줄 알았어?”

1.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보경의 집에서 보낸 2주라는 시간은 지수에게 26년 동안 느껴본 적 없던 생경한 감정들을 일순간에 알게 하기 충분했다. 그간의 삶에 대한 회의감 따위를 느낄 여유도 없이 지수에게 보경은 늘 숙제처럼 새로운 감정을 안겼다. 보경과 3년 남짓 연애하는 동안 타박상 비슷한 것조차 난 적 없던 진아가 좀비에게 물려 돌아온 날에도 별일 아닌 듯 차분하게, 일말의 슬픔도 없이 상황을 수습해 나갔던 보경이었다. 입을 벌린 채로 몸이 꺾이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진아를 보며 종일 벌벌 떨기만 하던 지수도 어느새 보경의 옆에서 진아의 회복을 도왔다. 감염 초기 보경은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노트북과 진아 만을 번갈아 가며 상대했고, 그 덕인지 언론에 보도된 바와는 다르게 진아는 곧바로 좀비로 변하지 않았다. 멋대로 움직이는 몸은 얼마 안 가 진정됐지만, 감염으로 인한 상처는 며칠에 걸쳐 더디게 커졌고 피부 표면에서 장기로 퍼지며 심장을 비롯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끝내 좀비는 되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럴 때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알 리 없는 지수였다. 장례는 물론 사치였고 시체는 침대로 옮겨졌다. 보경의 선택이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무겁대”
지수와 함께 진아를 겨우 옮긴 보경은 취하기만 하면 늘 자신의 등에 업히던 진아가 언젠가 술주정으로 내뱉었던 말을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몸속에 있는 모든 수분을 빼낼 작정인 양 진아의 옆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보경에게 지수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날 누군가가 정문을 열어 외부인을 들였고, 보급품을 얻으러 가는 당번이 하필이면 진아였을 뿐인데,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보경을 보며 괜히 자책하게 되는 지수였다. 머릿속에 맴도는 잡념들을 지우느라 애쓰던 지수는 그렇게 된 후에도 한동안 진아의 옆에서 잠을 청하는 보경을 보며 종종 진아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지금은 시답잖은 농담으로 보경을 상대하는 사이까지 발전했지만. 

2.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 근데 있잖아, 진짜 나 감염되면 죽일 거야?”
“진짜 지랄 좀 그만할래?”
“아니 혹시나 해서.. 근데 진짜 감염된 사람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장을 찌르면 될까? 아니면 입을 찢어버려? 그럼 죽나? 아니면…”
“야.”
“응?”
“그만 떠들고 그냥 잠이나 자”


사실 지수는 죽어가는 진아와 힘겹게 그를 보살피는 보경을 보면서도 그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저럴 바엔 감염이 되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진작 죽었으면 지금까지 살지 않았으면 좀비 같은 거에 물려서 저렇게 죽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희망을 다 잃은 표정을 하고도 절대 진아의 곁을 떠나지 않는 보경을 보면 볼수록 지수는 문득 내가 진아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랬으면 보경은 그렇게까지 나를 살려내려 애를 썼을까.

지수는 목요일 퇴근길마다 편의점에 들러 젤리를 샀다. 이가 아릴 정도로 달고 시큼한 젤리를 입에 물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드디어 하루만 지나면 주말이 온다는 사실을 즐겼다. 대충 가방만 뺀 상태로 바닥에 누워 젤리 한 봉지를 다 먹을 쯤이 되면 문 밖에서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어디야? 어, 나 지금 집 앞인데. 밥은.. 사먹자고? 어제도 사먹었잖아. 그냥 내가 뭐 만들어둘게. 어, 나 그냥, 맥주 사서 들어왔지 뭐”
지수가 목요일마다 젤리를 사오는 것처럼 목소리만 익숙한 그 사람도 언제나 맥주를 사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어김없이 통화를 하면서 지수의 집을 지나 자신의 집 앞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태우고는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담배피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가서 말을 걸 만큼의 힘은 없던 지수였다.
담배 냄새가 문틈을 타고 슬슬 넘어올 때면 통화 소리가 끊겼다. 그러다 들어갔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맥주 캔을 따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안 지나 캔 찌그러뜨리는 소리와 함께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3.

목소리의 주인을 보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뒤였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뒤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던 지수가 참을 수 없는 허기로 뛰쳐나왔을 때,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듯 보였을 때 복도에서 지수의 뒤를 덮치려고 한 좀비의 뒤통수를 깨준 인물. 보경이었다. 말하자면 구세주였다. 괜찮아요? 이 시간에 혼자 다니면 어떡해요. 어쩐지 핀잔이 섞여있는 그 목소리를 지수는 단번에 알 것 같았다.
맥주 좋아하세요?
그 뜬금없는 질문에도 보경은 잠깐 미간을 좁혔을 뿐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어떻게 아셨지? 저 좀비한테 안 물려도 맥주 못 마셔서 죽을 것 같아요 요즘. 지수는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 길로 보경의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진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글쎄, 실망했나? 반추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왜?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우리 샛별초로 갈까?”
쟤한테?
그랬다하더라도 지금은 소용없는 이야기다. 샛별초는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보경과 진아와 지수가 그 곳으로 가지 않은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라는 것. 두 번째는
“무서워…”
백퍼센트 지수의 탓이었다. 보경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한테 죽여 달라 할 용기는 있고 그건 무서워?

4.

“근데 너도 참 그래.”
매번 저만 순 겁쟁이 취급을 당하는 게 영 억울했던 지수는 목 끝까지 올렸던 이불을 훽 걷어올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깜깜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침대 위 보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지수는 말을 이어나갔다.
“넌 무섭지도 않아? 밖에 왜 나가고 싶어? 괜히 나갔다가 우리 둘 다 물리기라도 하면 그땐..”
“못 있겠어.”


지수의 말이 뚝, 잘려진 그 위로 보경의 말이 쿵 떨어졌다. 갑자기 대뜸 못 잊겠다니. 뭐를. 누구를? 지수의 의문이 입밖으로 나오려던 때 보경의 설명이 더해졌다.
“여기에 더는 못 있겠다고.”
보경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어둠에 금세 적응한 지수의 시야는 보경의 얼굴을 거쳐 벽에 붙은 사진 속 형체까지 또렷하게 그려냈다. 따라간 시선의 끝엔 보경과 진아, 두 사람이 웃고 있었다. 짧게나마 사진을 바라보던 지수는 고개를 거두고 축 늘어진 목으로 집 안을 하나 둘 흝어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창문 밖을 보는 일이 잦아졌던 지수는 그제서야 집이 눈에 띄게 훤해진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짐도, 어지러진 보급품도 없었다. 마치 이사 준비를 끝마친 듯 집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대체 얘는 언제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 지수는 털썩 베개 위로 엎어졌다. 다 헐어진 창문 사이로 내려 앉은 옅은 빛을 곰곰이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지수는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있다. 무섭지도 않느냐니. 밖에는 왜 나가느냐니. 아무렴 자기 애인이 눈앞에서 죽은 장소보다 무서운 곳이 있을까. 지수는 무언가 결심한 듯 정적을 깨고 보경을 불렀다.
“보경아. 자?”
“아니.”
가보든가. 샛별촌가 뭔가 하는 거기.

눈을 떠도 딱히 아침같지 않은 곳. 여기저기 집안을 쏘다니는 보경의 발소리에 잠이 깬 지수였다. 몸을 일으키자 젤 먼저 신발장 앞에 두둑히 싸져있는 배낭이 보였다.
“뭐 저렇게 잔뜩 가져가? 거기 다 있는 거 아니었어?”
“가는 길이 예상보다 더 걸릴 것 같아서 먹을 거 좀 챙겼어. 찾아보니까 적색표시 된 구역 피해서 가려면 좀 돌아서 가야 되더라고.”
지수는 금세 끄덕거리곤 기지개로 몸을 쭉 폈다. 이제 이 쇠창살같은 창문과도 끝이라 생각하니 괜히 기운이 들끓었다. 바삐 움직이며 도끼든 방망이든 여러 무기를 열심히 챙겨대는 보경을 보니 전에 했던 걱정들이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자, 가방은 니가 매.”
보경이 지수에게 배낭을 건넸다. 배낭을 받아든 지수는 바닥에 털썩 앉아 헐어진 신발끈을 고쳐묶었다. 막상 좀비떼가 득실거릴지 모르는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덜컹.
툭.
보경이 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나자 지수는 즉시 고개를 들었다.
“보경아.. 너 뭐해?”

지수는 쪼그려 앉은 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제 앞에 나타난 보경을 빤히 올려다봤다. 보경의 등에 올라탄 무언가의 그림자가 지수의 발 위로 성큼 떨어졌다. 지수의 얼굴이 순간 시퍼렇게 변했다.
“너 그거 혹시.. 진아야?”
“어.” 보경이 묻는 말에 빠르게 대답했다.
“진아를 들고 가서.. 뭐 어쩌게?”
“뭔소리야? 그럼 너 여기에 진아 혼자 두고 갈 작정이었어?”
문을 앞에 두고 대치한 상황의 두 사람은 그제야 서로의 의중을 깨닫고는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난 네가..”
지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동공만치 흔들리는 목소리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쳤구나. 죽으려고 작정했어.
이윽고 지수는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밤새 그렇게 정성껏 짐을 싼 이유가, 굳이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을 꾹꾹 눌러담아 저한테 건넨 이유가 다 진아 때문이었다고? 결국, 또 진아라고. 지수의 눈이 삽시간에 빨개졌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너 상황 파악 안 돼? 야, 밖에 좀비가 득실거려. 죽은 사람 챙기다가 산 사람 다 뒈지라고?”
그 이후로도 지수는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 니가 그렇게 잘났냐. 겁대가리 없는 게 자랑이냐. 가만 보면 제일 무식하다는 둥. 두서없이 터져나오는 말은 멈출 기세가 없었다. 제 앞으로 쏟아지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보경은 가끔 입가를 움찔대기도 했으나 듣는 내내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다. 굳이 달래지도 화내지도 않으면서 이 대화가, 혹은 이 싸움이 지속될만한 어떠한 동조의 반응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 걸려있었고 그게 지수의 입을 점점 느리게, 말들을 바싹 마르게 만들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정적은 참 쉽게도 그 공간을 차지했다. 보경의 건조한 눈은 끝났으면 이제 좀 나와.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런 그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꾸역꾸역 울음을 먹은 목소리는 정적을 깨고 나왔다.
“그냥.. 우리나 살면 안 돼?”
잠깐의 침묵과 그새를 또 기어들어오는 잔뜩 작아진 목소리.
“너 나는, 아니 네 목숨은 안 중요해?”
보경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제야 이미 지나간 말들을 하나 둘 대꾸하기 시작했다. 말 똑바로 해. 나가도 안 뒤져. 그래도 두고 갈 순 없어. 진아 묻어줄 거야. 상황이 나아지면. 그리고
“중요하지.”

“..근데 진아만큼은 아니야.”

그리고 보경이 저를 두고 나갔었나. 아님 내가 보경을 따라나섰나. 지수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제 머릿속에서 자신은 진아가 누워있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산 사람보다 무거운 시체를 멘 보경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 목숨보다 중요한 죽은 목숨이라니. 지수는 눈을 감은 채 그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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