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트위터 이용자 @fries_vonyeosu님의 트윗을 인용한 제목입니다)

정승오 감독의 영화 <이장>은 한 가족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영화는 ‘4녀 1남’이라는 남매의 구성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가부장제의 지긋지긋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매들은 서로 유기성이 전혀 없는, 각각이 아주 다른 사정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한 연령대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의 차이일 뿐 결국 모두 ‘가부장제’에서 비롯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정들을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겠으나 맏이, 즉 장녀 혜영은 그중 가장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워킹맘이자 싱글맘인 그녀는 다니고 있는 회사로부터 육아휴직 후 그만둘 것을 권고 받는다. 혜영에겐 정서불안인 아들이 있고,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챙겨야할 동생이 넷이나 있다. 혜영의 ‘k-장녀’적인 면모는 남매간의, 혹은 남매와 큰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주가 되는 내용에 따라 자세히 다뤄지지는 않았으나 아예 생략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남매들 사이에서 혜영은 가장 이성적이고 차분한 인물로 그려지고, 남매간의 다툼은 거의 전부 혜영의 만류로 해결되며, 동생들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고지식한 발언에 참지 않고 한마디씩 할 때에도 혜영은 혼자서 꾹 참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가 아들을 원했다는 말에는 발끈하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빨리 철이 든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과학적인 사실일까, 혹은 예로부터 여성에게 강요된 부양의 의무가 작용한 사회적인 결과일까?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도대체 왜,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영화에서는 그 어떤 과거 회상도 등장하지 않지만 남매간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보건데 혜영은 지옥 같은 가부장제 속에서 지독한 ‘k-장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감정적인 분출구, 엄마가 없는 동안 빨래, 청소 등의 집안일, 동생들의 생활 전반 따위를 책임지는 역할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디테일한 추리가 가능한 까닭은, 꽤 최근에야 수면 위로 떠오른 ‘k-장녀’들의 이야기가 내 한세대 위로만 올라가도 굉장히 흔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k-장녀’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가부장제가 낳은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특징으로 뽑히는 쓸데없는 책임감, 심각한 겸손함, 습관화된 양보 등은 부모와 형제를 챙기느라 챙기지 못한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이유 모를 죄책감을 동반한다.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그리고 얼추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아 서늘하다. 앞서 이야기한 빨리 철이 드는 여자들에 대해서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이어진, 이 끔찍하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답습을 통해 여자들이 그렇게 ‘진화’해버린 게 아닐까 하고.

2021년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은 가부장제는 앞으로도 쉽게 자취를 감추지 않을 것이다. ‘k-장녀’ 또한 그렇다. 하지만 ‘k-장녀’라는 이름을 빌려 암묵적으로 쉬쉬하던 가부장제의 부조리함이 까발려졌다는 점은 꽤 유의미하다. 또한 요즘의 ‘k-장녀’들은 영화 혹은 드라마, 책 속에서 더 이상 가족들의 뒷바라지만을 하고 있지 않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다가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며 왕실에 파국을 몰고 오기도 하고(드라마 킹덤), 남자 형제들 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끊임없이 분노하며(드라마 하이에나), <이장>에서는 “고추가 무슨 벼슬이냐”는 말을 대놓고 한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기괴한 말을 뻥 차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문제를 인지했다면 그 낡은 질서와 하루 빨리 작별해야 한다. ‘k-장녀’ 서사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여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자라서 해야만 하는 일’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게도 세상의 모든 k-장녀들을 응원하고 싶다. 스스로를 조금만 더 다독여달라는 말로.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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