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제한된 시간 안에 각자 쓰고 이달의 장원으로 뽑힌 멤버의 글을 첫 문단으로 하여 릴레이 소설을 씁니다.
3월의 문장은 영화 봄날은 간다, 상우의 “내가 라면으로 보여?”이고, 장원은 오이입니다.

*일필휘지의 기획은 궁유정, 이옥섭, 한태의 감독님의 글쓰기 모임인 일필휘지를 빌려온 것으로 세분께 콘텐츠 제작을 허락받았습니다.

「내가 라면으로 보여?」

글쓴이/ 오이 땡선 빈다 183

내가 라면으로 보여?

시발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그 순간 정적이 일었다. 술에 꼴은 선배를 힘겹게 어깨로 받아내고 있던 현희는 놀란 얼굴로 민정을 쳐다봤다. “….무..어?” 술에 꼴아 죽 늘어진 혀가 힘겹게 대답했다.

“여기가 니들 라면먹이는 데냐? 돈 없고 배고프면 집 가서 잠이나 쳐 자지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극단 사람들은 모두 민정을 쳐다보고 있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오자마자 뛰어 들어가던 정석은 현장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채 개운한 얼굴을 하고서 눈치 없이 지껄였다.

“야, 라면은, 끓이고 있어?”

그때 박 선배의 희번덕 뒤집어졌던 눈이 슬그머니 제자리에 돌아온다.

“그래, 라면! 라면으로 보인다. 어쩔래?”

절로 기운이 빠지는, 박선배의 말장난 같은 대답이었다.

1.

“또 알알거린다. 요 쬐까난 개-쉐끼.”

박선배는 제 몸을 부축하던 팔들을 이리저리 뿌리치고 성큼 다가와서는 민정을 내려다봤다. 익숙한 눈깔, 이젠 익숙한 방식. 이전 날에도 선배는 화가 나서 씩씩대는 민정에게 또 대든다며 제대로 된 대꾸도 없이 몸을 슬쩍 붙여와 웃기지도 않은 개 타령을 해댔었다. 맥락을 못 읽는 건지 안 읽는 건지. 박선배는 항상 저 혼자 태평하고 저 혼자 아무렇지 않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앞에 선 박선배의 새까만 눈이 꽤나 당당하게 울렁거리자 민정은 처음으로 얄밉기 짝이 없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나가, 좀 꺼지라고!!!”

민정이 핏대를 세워가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니 어느덧 구경꾼이 된 나머지 사람들이 슬슬 허리춤에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하룻밤의 하극상이라 한들 극단 안에서 상도덕은, 특히 선후배간의 예의범절은 후배 따위가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이라는 걸 상기시키는 일종의 경고 표시였다. 어쩐지 일 대 다수로 배열이 맞춰진 공간에서 극단 선배 몇몇은 아랫입술을 꾹 물고 꾸짖을 준비를 마친 듯 했고, 동기와 후배들은 진땀을 빼며 소리 없이 입만 벙긋댈 뿐이었다.

“야 너 미쳤냐? 이게 어디 선배한테 씨.

현희는 비틀대던 박선배를 언제 후배에게 넘겨버렸는지 민정의 앞에 떡 하니 서서 술기운을 벌컥 삼킨 열을 시뻘겋게 내뿜고 지레 겁을 준답시고 나선다. ‘꼴에, 꼴에, 암 것도 모르면서. 다 좆같은 것들이다.’ 민정은 시끄럽게 맴도는 말을 입속으로 삭혔다. 현희는 한 마디만 더 하면 줘 패버리겠다는 암묵적인 협박인건지 박선배를 지키는 태세로 눈을 힘껏 부라리며 민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2.

민정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 아까부터 웽웽 울리는데도, 민정은 받지 않고 서 이들을 적대하고 있었다. 담배를 태우고 들어가겠다며 단원들을 먼저 올려 보낸 상미는 민정이 전화를 받지 않자 편의점에 가 적당히 마시다 집에 갈 셈으로 맥주 네 캔과 과자 몇 봉지를 산다. 분명히 화가 나있을 민정을 생각하며 민트초코 아몬드도 하나 넣는다. 며칠 전 켜져 있는 박선배의 핸드폰에 눈길이 간 게 화근이었다. 화면 속에는 ‘우리민정이’와의 카톡방이 켜져 있었고, 극단 군기로 힘들어하는 민정에게 박선배는 되도 않는 애교와 하트 이모티콘까지 써가며 민정의 기분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애한테 도움은 못 될망정 술에 취해 민정의 집으로 가자던 박선배였다. 박선배는 극단 최고참이었으므로 상미는 둘의 연애를 알아도 모른 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민정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 뺀다면.

카톡을 읽지 않는 민정이 불안했는지 상미는 계산을 마치고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간다. 좆됐다. 방음에 취약한 상가에 지어진 여느 자취방답게, 아래층에서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상미는 특유의 넉살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이미 민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아씨 그니까 안 하면 될 거 아냐 좆같은 똥군기 더러워서 내가 나갈 테니까 지금은 내 집에서 좀 나가요!!!!”

“야 김민정 너 말 다했냐?”

한 대 칠 듯이 민정에게 다가오는 현희를 상미는 다급하게 말린다.

“왜이래~ 오늘은 우리가 너무 했지.. 갑자기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현희야 너 진정 좀 하고 집에 가자. 내가 택시비 줄게.”

돈이라고는 아끼는 법 밖에 몰라 담배도 얻어 피던 선배가 택시비를 내주겠다고 하니, 현희는 놀란 눈치로 상미를 쳐다본다. 상미의 등 뒤에 서있는 민정과 그들을 마주보고 있는 현희. 묘하게 편이 갈라진 상황처럼 보이는 셋의 구도에 라면을 먹고 있던 몇몇은 그들을 올려다본다. 민정은 바닥에 널브러진 박선배를 보며 소리를 팍 지르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상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따라 나간다.

3.

“야 김민정, 민정아 잠깐 서봐.”

“..왜요..”

화를 참고 있는 건지 찬바람을 좀 맞으니 좀 전의 일이 민망해진 건지 민정은 느릿하게 대답한다.

“너 아무리 우리가 맘대로 찾아왔다고 해도 그렇지 선배들 다 있는데 그러면 어떡해.”

상미는 민정을 달래듯 말을 걸어본다.

“나 담배 좀 펴도 돼?”

상미는 민정의 눈치를 슥 살피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꺼낸다.

“민정아, 우리가 너무 꼰대같고 싫어? 그래도 극단 나간다고 그렇게 말해버리면 우리 섭섭하잖아~ 이제 막 시작하는 작품도 있는데.”

민정은 연기를 피해 한 발짝 물러나서는 민망한 얼굴을 하면서 대답한다.

“힘들긴 한데요.. 저도.. 정말 그만두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죄송해요. 이따 올라가서 다른 선배한테도 사과할게요… 그냥 좀 제가 요즘 화가 많아요. 죄송해요.”

상미는 민정과 처음으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상황이 그것도 민정의 속사정을 듣는다는 게 내심 기쁘면서도 박선배한테는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고 심지어는 버럭버럭 화도 잘 내면서 자기한테만 입을 아끼는 민정이 이상하게 밉기 시작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은 이었지만 속으로는 계속 박선배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이 맴돌아 너네 둘이 사귀는 거 나 다 알아 하는 말이 아슬아슬하게 목구멍 앞에 걸쳐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4.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뭔데. 말해봐.”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툭 터놓고 이야기해보라는 양 부추기자 잠시 머뭇거리던 민정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상미의 옆으로 다가와 주저앉는다. 무릎에 팔을 세워 턱을 괸 후엔 한숨 같은 목소리로 서두를 끊는다.

“제가 애인이 있는데요.”

상미의 눈썹이 티 나지 않게 꿈틀댄다. 순식간에 능글맞은 박선배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권태기인가 봐요. 그냥 막 짜증이 나요. 인기가 너무 많아요 걔가.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걸 아는데도 다른 사람이랑 재밌게 떠들고 있는 거 보면 빡쳐요. 나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는 불안해 미치겠는데 지는 존나 태평하고..”

뭐라 더 이어지는 민정의 투정을 뒤로하고 상미는 자연스레 몇 분 전의 상황을 떠올린다. 박선배에게 윽박지르던 민정의 앞을 가로막듯이 튀어나온 현희. 곧 심란해 보이는 민정의 옆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일순 눈치 챈다. 그래, 현희구나. 민정이는 현희가 거슬리는구나. 그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어보인 민정이 상미의 의견을 묻는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희는 원체 박선배를 잘 따르는 식이었고 상미는 거기에 아무런 사심이 없을 거라 확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정의 입장에서는 그게 영 심상찮은 애정 전선으로 보인 거겠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희는 본래 조금 과몰입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모든 상황을 꿰뚫고 알게 된 상미는 지금 민정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거 그냥 질투야. 네가 박선배를 너무 좋아해서 질투가 나는 거야. 그리고 박선배도 너 엄청 좋아해. 권태기는 개뿔이.

그럼에도 그렇게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이 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의 큐피드 짓을 자처할 만큼의 대인배는 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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