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need to talk about 모성

이전에 글을 쓴 적이 있었던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는 모성애 또한 그렇다. 존 보울비의 애착이론에 따르면, 유아가 부모와 애착관계, 즉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접촉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모성애는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애정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셈인데, 그럼에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모성애를 당연시하며 신성화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퍼져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초반부에서부터 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시작한다. 영화는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주인공 에바가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겪은 후 아들 케빈을 양육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극을 흥미롭고도 고통스럽게 끌고 가는 것은 말을 할 수 있게 될 무렵부터 드러나는 케빈의 소시오패스적인 면모인데,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땐 케빈이 왜 그렇게 자랐고 또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했다면 근래 다시 관람하게 되었을 땐 몇몇 씬을 제외하고서 시종일관 넋이 나가 해골 같은 얼굴을 한 에바에게 더 관심이 갔다. 출산 직후 남편과 대비되는 공허한 얼굴이라거나 울음소리가 지겨워 일부러 시끄러운 공사장을 지나가는 장면,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다”와 같은 직접적인 대사들은 통상 미디어에서 그려지던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묘사이기 때문이다.

  에바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생겼다면 부모 모두 자신의 삶 일부를 포기하게 되더라도 응당 책임을 져야한다. 또 이후에 실제로 에바는 그렇게 한다. 다만 이해할 수 있겠다는 거다. 삶의 중심이 ‘나’에서 타인으로 뒤바뀔 때의 괴리감은 경험하지 않고서야 평생을 알 수 없을 감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 혼란스러움을 여태껏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기 때문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진실은 터부시되고 있다. 여전히 ‘마땅히 기뻐해야할 일’이며 아이를 품고 낳은 여성은 아이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진실처럼 퍼져있다. 대상이 누구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화 개봉 당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고 한다. 케빈이 소시오패스로 자란 것은 에바의 모성애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과 선천적인 특성이라는 반응.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케빈에 대한 책임은 에바에게만 부여되는 걸까? 남편인 프랭클린은? 왜 부성애는 강요되지 않는 걸까? 다만 아이가 자라고 나오는 곳이 남자의 몸이 아닌 자궁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다른 엄마에 관한 이야기 영화 <툴리>는 말미에 평소 육아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 않은 남편이 모종의 사건으로 각성하며 마무리된다. 동화같이 비현실적인 엔딩이라고 느껴졌다. 에바의 남편 프랭클린을 생각해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사실은, 그거야 말로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 아닐까? 아이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짊어지게 하지 않는 것. 모성애와 부성애는 결국 같은 성질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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